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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세오에게 보내는 편지

언제나우린너와함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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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떤 경로로든 이걸 읽게 되실진 모르겠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에 글을 씁니다.

감독님 주변의 누군가는 정말로 이 글을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2013년부터 수원을 지지해 온 서포터입니다.

지지해 온 동기는 별게 아닙니다. 그냥 축구 게임에서 우연히 K리그 팀을 선택했고

그게 하필이면 수원이었습니다. 그런 시시한 동기와는 다르게

어느 순간부터 주말에 한두 번씩 경기를 챙겨보게 되고

정대세, 염기훈만 들어 봤던 제가

국가대표 왼쪽 윙백에는 양상민을 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수원이 이긴 날엔 기분이 좋았지만,

진 날엔 기분이 안 좋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2016년도에는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비겨도 그렇게 기분 나쁘게 비길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팀을 좋아한다거나, 당장 주말 일곱시만 되면 서둘러 티비 앞에 앉는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습니다.


단골 음식점 시그니처 메뉴의 맛이 달라진다면 그냥 다음부턴 다른 집을 가면 됩니다.


그런데 축구팀은? 축구팀이야말로, 한 시대의 추억을 독점하는 존재입니다.

제가 수원을 지지한 2013년, 저는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처음 여자애 손을 잡아본 날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제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할 것 같으십니까,

처음 여자애 손을 잡은 날?


아뇨, 정대세와 산토스의 활약에 힘입어 슈퍼매치를 2대 0으로 잡은 날로 기억합니다.

과외가 끝나고 걸어가던 길에 우연히 맞닿아 잡게 된 손의 설렘 따위는

티비 속에 나오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흘리는 땀방울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수원이 어느새

제 추억을 독점하고 있던 셈입니다.


처음으로 꿈이 생긴 날은, 첫 수원더비가 있던 날입니다.

정말 친했던 친구와 절교한 건, 조나탄이 전남전에서 그 오버헤드킥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하던 날입니다.

대학 추가합격 통보를 받았던 날은, 데얀이 수원에 왔던 날입니다.

재수학원을 간다는 친구에게 마지막 편지를 준 건, 전세진이 논란 끝에 1군에 합류했던 날입니다.


한 팀의 서포터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신기하고도 무거운 일입니다.

저 날들은 다르게 부르자면 얼마든지 다르게 부를 수 있고, 저날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이

꼭 축구 뿐만은 아닌 날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저 날들을 저렇게밖에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 날은, 분명히 저 이름이어야만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자 그대로 사랑하는 존재에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방식의 응원이기 때문입니다.


감독님께 묻고 싶습니다.

정말 감독님께서는 지금의 상황이

다른 수많은 이름들을 버린 채 하나로 붙여낼

추억의 이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기억하는 제 시간들을

당신은 얼마나 더 소중한 추억으로

묶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점점 두려워집니다. 대학 엠티를 간 날은 그냥 대학 엠티를 간 날이 되고,

동아리에서 처음 버스킹을 한 날은 그냥 버스킹을 한 날이 되는 것이 두려워집니다.

점차 수원이 가지는 의미가 작아지는 게, 우연히 한 선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게 우리 선수가 맞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게 너무 두려워집니다.


얼마 전엔 수원의 경기가 있던 날, 서울에 놀러 가 어쩔 수 없이 서울과 제주의 경기를

직관하게 되었습니다.

경기를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습니다.

서포터가 아닌 장내 아나운서가 응원을 주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아나운서 없으면 응원을 못하나 싶을 만큼.

서울을 공격하는 게 아닙니다. 그쪽도 원정 가면 응원 잘 하는 거 압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명백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수원이라는 구단의 주인은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주말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굳이 경기장에 가는 사람들,

지금 내 목에서 피가 나고 부을지라도 경기장 위에 있는 선수들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실어주고픈 사람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뛰는 사람들이야말로

제가 본 진정한 이 구단의 주인이었습니다.


감독님을 수원에 남게 하는 이유와, 힘이 무엇인지는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한번쯤은 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2위, 7위, 3위, 이런 급한 순위 변동에 실망한 것도

실망스러운 영입에 좌절한 것도

괜히 한두 경기 졌다고 식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승을 항상 목전에 두던 팀이

점점 목표를 작게 잡고

그렇게 작은 클럽이 되어가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감독님은, 감독이기 이전에 수원의 팬이었습니다.

이 문구 아실 겁니다, '언제나 우린 너와 함께해'

감독님이 수원의 팬이라면, 어떤 모습이건, 그러니까 꼭 감독이 아닐지라도


서정원이라는 이름의 수원팬으로

수원과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함께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울지

어떤 모습의 오늘, 내일, 앞으로의 시간들을 팬들이 기억할지

어떤 모습을 우리는 수원이라고 불렀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서정원을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젠가는 서정원의 가슴에 수원의 배지가 박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좋아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답은 명백하지만 답을 고르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도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팬들이

세오아웃을 외치는 데 필요한 용기보다 훨씬 더 필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은 또다시 다른 이름에 먹혀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어지럽고 구불구불한 길들 가운데 올곧게 뻗어 있는

단 하나의 출구에 감독님이 도달할 때까지 함께합니다.

이 단어는, 충동에 의한 것도, 푸념에 의한 것도, 군중심리에 의한 것도 아닌,

오로지 당신과 함께하는, 함께할 사람들의 외침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세오 아웃.


혹 읽어 주셨다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감독님이 수원과 함께하는 한, 언제나 우린 감독님과 함께합니다.


https://i.imgur.com/UbS1gKM.jpg

언제나우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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