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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캡틴 오 마이 캡틴

구찌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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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씨가 좋다. 
 
운이 어찌나 좋았는지 딱 좋은 시기에 좋은 사람을 만난지라, 나는 번듯이 한 사람분의 벌이를 할 수 있게되자마자 결혼을 하였다.
 
운이 어찌나 좋았는지, - 작은 자리지만 나랏밥을 먹는 처지라 -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어 주말부부 생활을 좀 했다지만 너무 늦기 전에 아내와 집을 합칠 수 있었고.
 
운이 어찌나 좋았는지 아이를 갖겠다 생각을 한 지 두 달만에 아이가 생겼다.
 
아내와 산책을 한다. 아이의 이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이름 저 이름을 불러보며 걷는다.
 
날씨가 좋다.
 
 
 
-2-
 
운이 어찌나 좋았는지 내가 태어난 도시에는 축구팀이 있다. 
'어디 사람이에요?' 라는 말이 딱 '지금 주민등록지를 두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는가?
 
고향을 떠나고야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축구팀 덕에 타향살이가 12년을 넘은 지금도 '수원사람'이라고 대답하곤한다.
 
이 팀이 대한민국 최강의 축구팀이었던 것은 내가 수원에 살던 시절 이야기이고 (이때는 딱히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니 신기한 일이다.) 지금은 그저 그런 중상위권팀이 되어버렸다. (이런 때에 축구에 미쳤으니 그야말로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낙폭이 워낙에 컸던지라, 아직도 남아있는 팀의 고참들은 그 '레알 황족 수원'시절에 영입된 국내 탑급 선수들. 물론 2017년 현재로 오면서 그 화려했던 멤버들은 대부분 팀이 제시한 연봉 후려치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 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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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은 대충 이런 분위기다.>
 
그렇기에 2010년 수원에 입단하여 수원의 최고존엄이 된 남자. 26번 염기훈의 의미는 수원팬들에게 각별할 수 밖에 없다.
34살의 나이에도 거의 전경기를 혹사당하며 뛰면서 방금 교체해 들어온 선수보다 절박하게 뛰고 있는 선수.
팀이 연패로 최악의 분위기일때 프리킥골 한 방을 터트리고 팬들에게 달려와 아이처럼 우는 남자.
 
 
이제는 들어버린 나이. 이전같지 못한 기록에 계속해서 연봉을 깎는 팀에게 서운하면서도 이적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사람.
오히려 몸무게를 줄이고 플레이 스타일을 바꿔가며 최고의 폼을 되찾아 제 2의 전성기를 연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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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존엄 시절의 염기훈>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에 중동에서 제안한 연봉 13억짜리 오퍼.
'돈보다 중요한게 있다'며 거절한 캡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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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축구가 4년에 몇 경기뿐인 사람들에게는 이 한 순간으로 기억되었겠지만>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의 선전에도 불구, 고작 슈팅 하나로 조롱을 받았던 선수가 결국 다시 부름을 받아 조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염름발을 다시 봤다는둥 어쨌다는둥.
 
축구팬으로서, k리그 팬으로서 FC코리아에 어쩌구 저쩌구 어깃장을 늘어놓는거야 재미도 없을 이야기니 넘어가지만. 
 
수원 팬이자 염기훈의 팬으로서,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하는 대중의 비난을 환희로 돌려놓은 이 남자에 대해 어떻게 감탄사를 늘어놓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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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 선수 아내의 인스타그램>
힘든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던 그때 우리
돈을 많이 벌어서 특별한 환경을 줄 수 있는 아빠보다는
매일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아빠가 되자며 택했던 길이 틀리지 않았던거지 우리.
 
- 3 -
 
아버지가 된다.
 
나는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물론 다행한 일이다. -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건 자식이 먼저 죽지 않았다는 말 아닌가.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 
 
어찌보면 설익은 애같은 소리지만. 이런저런 일로 죽음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
 
살아있는 아버지로 최대한 오래 있어주는것.
그리고 그 기간을 어떻게,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고민이 익어가는 가을밤이다.
 
그래도 운이 어찌나 좋았던지. 이런 선수가 있는 이런 팀을 좋아한지라. 작게나마 갈피를 잡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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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오 마이 캡틴>
 
p.s. 개인적으로 친구들과 글을 쓰는 곳에 썼던 글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서.... 수원팬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글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구찌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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