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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K리그 자료 조사하고 난 뒤 느낀점 (+축구계의 환단고기 동대문 아재론에 대해서)

PHILIPOPE
199 7

우선 90년대초부터 96년까지 K리그 평일 경기는 저녁 5시에 열렸다는 사실이 있음을 알았다. 

2017년인 지금조차 평일 저녁 5시에 경기를 열면 학교마친 초중고 학생들이 잠깐 들어올까 말까한 관중수를 기록한다. 

하물며 90년~95년 사이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평일 저녁 5시에 직장인들도 일하고 고등학생들도 공부하고 대학생들도 서울에서 놀기 바쁜 그 피크타임에 과연 몇명이나 들어왔을까? 

 

오죽하면 그때 동대문을 쓰던 유공단장조차 '서울에서는 점점 축구인기가 사그라짐을 느낀다' 고 했을까. 

 

연맹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뭐 몇가지가 있긴하다. 

최초 동대문에서 경기하던 세구단들 (유공 일화 럭키금성)에게 부담을 지어줄 이유는 없었다. 

단기간에 투자약속을 강요하는 것은 세 구단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서울을 나가게 하는 요인이 되긴 했다. 

몰론 그렇다고 해서 그걸 연맹이 서울을 비우기 위해서 그렇게 뻥카를 날렸다고 해석을 하면 안된다. 

만약에 연맹이 95년 당시 세구단이 출자해서 축구전용경기장 두곳을 짓게 하라고 하고 플랜을 짰다면 

아마도 그 세팀중 두팀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한팀은 서울의 새로운 축구전용구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장기적이며 온화적이며 설득을 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은 비판받을 만한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게 된 현상을 온전히 연맹의 무능력 탓으로만 전가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서울 공동화 정책이 K리그를 망쳤다고 하는데 

난 오히려 그런 있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현상으로 존재하는 그때 연고지 재조정이 훗날 K리그에 엄청난 부흥을 안겼다고 본다. 

서울의 베드타운에 불과했던 안양, 부천등에는 프로팀을 운용하면서 연고의식이 싹트고 르네상스시기에는 확실히 이 두팀이 

수원이 창단됨과 동시에 박터지는 관중폭발을 이끌었다. 

특히 유공애들은 참으로 웃긴 애들인데, 서울에 남아있게 해달라고 징징대며 목동에 남아있을때는 관중수 폭망이었고 

부천으로 옮겨서 경기를 하니까 관중수가 올랐다(...). 

즉, 연고지 때문에 관중수에 흥행과 저조가 오가는 것이 아니다. 

흥행은 타이밍, 그리고 적절한 홍보, 그리고 지역민들의 의식, 리그내 스타의 부재유무등이 오고간다. 

90년~94년 유공, 일화, 럭키금성의 관중수는 거의 폭망수준에 서울 시민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잘 알지 못했다.(축구팬은 알았겠지) 

그러나 각각 연고지 재조정을 거친 결과로 그나마 전체적인 인지도가 상승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팀들이 땡깡을 부리며 서울에 남아있었다면 '이게 프로냐?'하면서 프로축구의 인지도는 전반적으로 추락했을 것이며 

아마도 2000년대 전후를 즈음하여 구단해체, 또는 연고를 서울에서 다른 지방으로 이전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96년이 진정한 한국 프로축구의 원년으로 보아도 무방하며 96년 이전의 프로축구란 것은 프로의 탈을 쓴 아마 실업축구대회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더불어서 96년에 창단된 수원의 예를 들어봐도 폭발적인 관중수 유치의 근본 원인은 투자와 마케팅 그리고 지역민의 관심과 응원열기에 좌우되는 것이지 연고지를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서울에 유지한다고 그냥 자동적으로 성공한 구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동대문 아재론이라는 '아 나는 그때 유공의 경기를 보며~ 일화와 포철의 대결~'하며 운운하는 작자가 있다면 

아... 얘는 관중수 천명도 못넘기던 그때 그 참혹한 시절에 축구를 본 축구팬이구나하고 그냥 넘기면 된다. 

축구경기를 봤지 응원을 했니? 

참...... 어이가 없다. 

 

 

 

PHILI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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