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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수원 외국인 선수 되돌아보기 - 2010년 ②

CS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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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수원은 부진을 면치 못하며 2004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차범근 감독이 결국 사퇴하게 되고 숭실대 감독으로 활동했던 윤성효 감독을 선임하기에 이르렀다. 사령탑이 바뀌는 와중에 전반기 동안 특별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주닝요와 헤이날도는 짐을싸고 돌아가게 되었다.

 

 

2010년 외국인 선수 일람

 

* 시즌 개막 기준

FW 5. 리웨이펑

→ IN : DF 3. 주닝요 / FW 11. 헤이날도 / FW. 9 호세모따

 

* 여름 이적시장 반영

DF 5. 리웨이펑 / FW 9. 호세모따

→ IN : FW 22. 다카하라 / MF. 8 마르시오

→ OUT : DF 3. 주닝요 / FW. 헤이날도

 

 

 

FW 22. 다카하라

 

수원에 오기까지 다카하라의 행적

 다카하라_보카.jpg

(↑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했던 그 시절)

 

 

 

 

 

1990년대 후반 일본 최고의 유망주 공격수 중 하나였다. 당시 일본에서 차세대 공격수로 이름을 알리며 다카하라 열풍이 돌기도 했다. 어찌 보면 호들갑일 수도 있으나, 불과 역 10년 전에 축구팬들도 10대였던 박주영을 보고 축구천재니 뭐니 하면서 엄청난 기대를 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도 보인다.

 

 

 

다카하라는 1998년 주빌로 이와타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였으며, 그해 AFC 19세 이하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9년에는 21경기 9득점을 올리고 FIFA U-20 월드컵에선 주전 공격수로 3득점을 올려 일본의 준우승을 이끌어 진짜로 엄청난 기대주로 불렸다고 한다. 상승세는 계속 이어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3득점을 기록했고, AFC 아시안컵에서도 5득점으로 6득점으로 득점왕을 먹은 이동국과 같이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되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인 최초로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명문 보카 주니어스에 입단할 정도면...

 

 

 

하여간 진짜 잘 나간 선수였다. 그러나 보카 주니어스에 진출한 이후로 불운을 겪게 되는데, 첫 시즌에 6경기 1득점으로 세계의 벽(?)의 실감한 첫 시즌을 치르고 두 번째 시즌에는 잘하고 싶어 이를 갈았으나,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친정팀 주빌로 이와타에 복귀하게 되었다. 뭐 해외 진출했다가 자국 리그에 복귀한 것 가지고 불운이라고 하면 과장이다. 진짜 불운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다카하라의 진짜 불운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낙마한 것이다. 분명히 최고 유망주로 입지가 탄탄한 선수라 월드컵 승선은 당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다리에 정맥 혈전증이라는 병에 걸렸고 재활하느냐고 월드컵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 부상은 상승세에 있던 유망주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었다. 잘 나가던 시기에 경력 공백과 더불어 메이저 대회 진출이 무산됐으니.

 

 

 

그럼에도 이 미친 재능은 이런 부상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이후 진행된 J리그에서 27경기 26득점을 기록하는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다. 이 활약으로 J리그 최연소 득점왕에 올랐고, 리그 MVP와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려 3관왕을 해버렸다. 참고로 위에 말한 정맥 혈전증은 독일에 진출한 2004년에도 재발해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고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 당시에 일본 선수가 해외 진출에 했다고 해서 축구 사이트에서는 마케팅용이라며 폄하했던 기억이 나지만, 위에 활약상을 보면 해외진출하지 못하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하여튼 그렇게 2003년 1월로 독일 분데스리가의 함부르크 SV에 입단했다. 그러고 무실점 행진을 하던 바이에른 뮌헨에게 골을 넣어 주목받는 선수가 되었고, 2004-05시즌에는 시즌 7골을 넣기도 했으나 이후에는 리그에서 한 골 정도밖에 못 넣으며 하락세를 탔다. 그러고 2006년에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갔지만 첫 시즌에 11득점을 올리며 프랑크푸르트 서포터들에게 지지를 얻은 것을 끝으로 다음 시즌에는 부상으로 시즌을 말아 먹었고, 감독과 전술 견해 차이까지 일어나면서 일본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국가대표에서는 독일 월드컵 출전하면서 처음 월드컵 무대에 서보기도 했으며, 2007년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두 팀에서 모두 초반 활약에 비해 가면 갈수록 활약도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릎 부상도 계속 문제가 되면서 일본으로 2008년 1월로 복귀하게 되었다. 입단한 팀은 당시 J리그에서 돈 잘 쓰는 팀으로 소문난 우라와 레즈였다. 일본에서는 특급 재능으로 이미 인정받은 선수라 활약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지만, 우라와 레즈에는 먹튀가 되었다. 내가 다카하라하고 대화해 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다카하라도 이 시절을 흑역사로 생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라와 레즈에서 폴케 핑케 감독이 측면 미드필더로 기용하면서 경기력은 거덜 났고 거기에 부상으로 계속 골골대던 터라 진정한 막장테크를 타고 말았다. 수원하고 상황을 비슷하게 꾸며보자면, 나드손을 측면에 박아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수원으로

 다카하라.jpg

(↑ 한중일의 평화의 기점)

 

 

 

 

 

그렇게 제대로 된 경기 출전도 하지 못하고, 2010년에는 4경기에만 출전하고 이후에는 팀 훈련에만 참가하고 아예 후보 라인업에도 포함되지도 않는 채 방치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게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기만 다카하라와 우라와 측 모두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 이 시기에 울산 현대와 FC 서울하고 연결되었다고 했는데, 몸값에 비해 폼이 너무 떨어졌단 이유로 결렬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0년 7월로 수원에 입단하게 되었다. 수원은 윤성효 감독이 새로 취임한 상태였는데, 취임 선물로 봐야 할 정도로 큰 영입이었다. 하지만 J리그에서 폭망하고 퇴물소리까지 듣던 상황이라 크게 반기거나 팬들이 두 손 들고 환영하고 그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몸값이 상당하기에 이적 초반에는 임대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적료 4억 원 수준에 완전 이적이었고, 우라와 레즈도 얼른 처분하고 싶었는지 연봉을 약간 부담해 주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완전 이적인데 뭔 연봉을 전 소속팀에서 주느냐고 반박할 수 있을 텐데 당시 다카하라가 J리그에서 받던 연봉 K리그에서 감당할 팀이 없는 수준이라서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원에 입단하고는 뭐 열심히는 뛰었다. 공격 진영에서 센스 있는 모습도 보여주고 의욕 있게 열심히 뛰고 다 좋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모습이 있었고, 그런 이유로 득점은 한동안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그럭저럭 평범하게 뛰던 다카하라는 2010년 8월 28일 서울과 경기에서 대폭발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 다카하라는 뛰어난 위치 선정과 미드필더 지역까지 내려와 노련하게 경기를 풀어주면서 수원의 라인이 벌어지지 않게 틀을 맞췄고, 득점도 두 개나 올리면서 수원의 완승을 이끌었다.

 

 

 

이 경기에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동아시아 화합의 골이다. 득점 상황은, 다카하라가 미드필더 지역에서 측면에 있던 리웨이펑에게 패스를 주고 리웨이펑이 돌파하다가 땅볼 슛인지 크로스인지 정체 모를 킥을 했다가 이상호에게 연결돼서 득점이 되었다. 이로써 한-중-일의 평화가 빅버드에서 완성되었다.

 

 

 

그 뒤 상승세를 타면서 이전보다 경기력은 좋아졌다. 확실히 예전 그 다카하라의 모습을 찾아갔다는 평이었는데 득점은 그다지 많이 올리지 못했다. 시즌 총 4득점을 올렸으며, 제주와 경기에서는 완벽한 침투 후 땅볼 슛을 찼지만 그게 골대를 맞고 나오는 아쉬운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던 영입인 것 같다. 공격 스텟이 아쉽기는 해도 다카하라가 투입되면 공격 작업 자체가 조금 더 유연해지는 그런 센스를 보여주었으니.. 이게 나름 기분 탓은 아닌 게, 다카하라가 있었던 2010년 후반기에 윤성효 감독의 뻥축구 성애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과 2011년부터 극혐 경기력까지 더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수원을 떠난 이후

 다카하라3.jpg

(↑ 이제는 구단주로)

 

 

 

 

 

다카하라는 수원을 떠나면서 개인 블로그에다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하며 수원팬에게 고맙다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다시 일본 시미즈 에스펄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시미즈에서는 이적 초반 좋은 활약으로 주포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점차 나이 문제인지 똥배가 점점 나오면서 경기력이 떨어졌고, 2013년부터 일본 하부리그로 내려가 활동하고 있다. 2015년까지 J3리그의 사가미하라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2016년부터는 오키나와 지역 리그에서 팀을 창단해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DF 5. 리웨이펑

 

 

 

(수원 입단 이전과 이후는 2009년 1부를 참고해주세요!)

 

 

2010년 리웨이펑

 리웨이펑.jpg

(↑ 헤딩머신 리웨이펑)

 

 

 

 

여전한 모습에 경기력에 있어서도 팀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이었다. 전반기 동안 수원이 상당히 부진을 보였음에도 리웨이펑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과 리더십은 늘 한결같았다. 그러나 은사인 차범근 감독이 2010년 여름을 끝으로 수원을 떠나게 되면서 리웨이펑의 거취도 불분명하게 되기도 했는데, 의리남 리웨이펑은 은사가 떠났음에도 수원팬들과 의리를 지켜 끝까지 수원에 남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렇게 감독이 바뀐 뒤에도 리웨이펑은 묵묵히 수원 수비를 지켰다. 윤성효 감독은 리웨이펑을 우측 사이드 풀백에 출전시키기도 했는데, 느린 리웨이펑을 사이드백으로 쓰는 미친 짓에도 불구하고 리웨이펑은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생각보다 그 자리를 잘 지켰다. 위에서 언급한 다카하라의 동아시아 합작 골도 리웨이펑이 측면 수비로 나온 경기이다. 이후 가을부터 센터백으로 돌아와 활동했으며, 2009년에 이어 2010년 FA컵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리웨이펑은 위에서도 의리남이라고 말했는데, 이게 빈말이 아니다. 2009년 시즌 종료 후에 전북 현대로부터 거액 이적료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고 했는데, 수원팬과 차범근 감독 때문에라도 안 간다고 단칼에 거절했던 남자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에도 수원에 남고자 했으나, 윤성효 감독은 리빌딩을 추진하겠다며 통보도 없이 팀에서 내보내고 말았다. 어찌 보면 버림받은 것이지만 의리남 리웨이펑은 여전히 시간이 나면 수원 월드컵 경기장을 찾아주고 있다. 크.. 멋진 남자..

 

 

 

 

 

MF 8. 마르시오

 

 

 

 

수원에 오기 전 마르시오는?

 

 

 

브라질 명문 크루제이루 EC에서 선수로 데뷔했지만 거기서 큰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하부리그로 임대를 떠난 선수이다. 오기 전 행적은 수원이나 여타 다른 K리그 팀들에 입성하는 브라질 선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선수였다.

 

 

 

체력은 평균이하 패스 보는 시야는 리그탑

 마르시오2.jpg

(↑ 체력만 좋았어도...)

 

 

 

 

 

2010년 전반기 동안 크루제이루 소속으로 브라질 세리 B 소속의 파라나에 임대를 떠난 마르시오는 2010년 7월로 첫 해외 진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크루제이루에서 임대를 떠나는 상태였으며, 다카하라와 같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여름 이적 시장에서 큰 선물이 다카하라였다면 마르시오는 곁다리 느낌이었다.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를 소화할 수 있다고 알려졌으며, 창조성이 떨어진 2010년 전반기 미드필더 라인에서 활기를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받았다.

 

 

 

여기서 창조성은 기대 이상이었다. 패스를 보는 시야가 상당했고,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도 정확한 스루 패스로 공격을 다양화했다. 여기에 다카하라도 움직임에 있어서는 여타 다른 공격수들보다 창의적인 면이 많아서 두 선수가 같이 출전하면 공격의 흐름 자체가 다양했던 기억이 난다. 근데 가장 큰 문제는 체력이었다. 마르시오는 딱 20분짜리 체력을 지녔다. 농담하는 게 아니다. 마르시오는 20분간 경기장을 누비며 엄청난 패스를 보여주다가 20분이나 30분이 지나면 세상에서 제일 힘든 표정을 보이면서 걸어 다녔고, 상대 수비 압박에도 맥을 못 추렸다.

 

 

 

간단하게 총평을 내리자면 체력만 뒷받침되었으면 K리그 무대를 평정했을 만한 실력은 있었다. 그러나 체력이 매탄고 선수들보다 낮아 보였다. 애초에 체력 문제가 없었으면 크루제이루에서 잘 먹고 잘살다가 유럽 진출하려 했겠지...

 

 

 

 

수원을 떠나고 마르시오는?

 

 

 

결론적으로 수원에서 생활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해외 진출이었다. 현재까지 브라질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마르시오는 2010년을 끝으로 크루제이루와 계약 기간이 끝났는지 2011년부터 폰치 프레타로 이적하였고, 길게는 한 시즌 짧게는 반 시즌 단위로 팀을 바꾸며 활동하고 있다. 2013년 아바이 FC에서는 팀 최고 위상을 자랑할 정도로 특급 활약을 펼치기도. 이후 여러 팀을 거치다가 현재 상파울루 주 1부 리그의 그레미우 오사스쿠 아우닥스라는 팀에서 활동한다고 한다. 아직 31살이니 은퇴는 훗날 할 것으로 보인다.

 

 

 

2부 끝. 

 

 

 

원하시는 다음 시리즈가 있다면 사이트나 페이스북 댓글로 남겨주세요.

 

참고로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중에서만 골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원 축구 본 것은 1998년 9월부터인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어리고 생각없이 봐서 기억에 남는게 별로 없습니다.. ㅠㅠ

 

게다가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고등학생 신분이라 경기를 못봤던 문제가...

 

긴 글이고 부족하지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CSW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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