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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no.22고종수

No.22고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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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5월의 어느 날.. 비가내리던 도쿄 국립 경기장에는 5만 8천여 관중석을 꽉 메웠던 울트라 닛폰의 탄식이 들렸었습니다.당시 일본팀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아시아의 신흥강호 그리고 한국은 이런 일본에게 추격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형국...이런 상황이 반영된 듯,일본은 전반 초반부터 거칠게 밀어붙혔고,한국은 볼 점유를 불과 30% 내외로 유지하며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경기의 일본팀 플레이메이커가 나카타 히데토시였습니다.
나카타는 그 날 경기가 바로 A메치 데뷔전이었으며,그 경기를 시작으로 앞으로 일본을 이끌 플레이메이커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이 날 경기에서 나카타는 정말 대단했죠.한국 수비를 마음껏 농락하며 찔러주는 칼날패스,혼자 2,3명씩 제끼며 슛팅까지 날리는 유연함.한 마디로 이렇게 전반 30여분까지 일본은 "나카타 효과"로 인해 한국을 일방적으로 밀어부쳤습니다.그러자 벤치에서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표정을 뒤로한 차범근 감독이 나카타보다 딱 1살이 어린 조그만 선수를 투입할 준비를 합니다.머리에 물을 뿌리며 감독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선수...
바로 한국의 22번 고종수 선수였습니다.
전반 32분에 마침내 고종수가 그라운드에 투입됐으며,한국은 그 때부터야 비로소 일본의 공세를 뒤짚으며 공격다운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일본 선수들이 특히 놀랐던건,한국에도 이렇게 기술이 좋고,창의적인 패스를 하는 선수가 있었다는 것.고종수는 이 날 게임에서 상대편 나카타를 완전 압도하며 게임을 지배하는데 성공합니다.당시 게임이 끝나자마자 일본의 가모슈 감독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죠.
"한국의 22번 선수가 고종수냐.대단하다.가장 눈에 뛴다.훌륭한 선수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열린 98년 프랑스 월드컵...월드컵에서 한국의 고종수는 137분간 출장하며,세계를 상대로 유일하게 기술력이 통하는 선수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당시 멕시코,네덜란드,벨기에의 오른쪽을 심각하게 괴롭히며 마음껏 플레이하던 한국 22번의 플레이를 보며,당시 프랑스 언론은 이런 기사를 씁니다.
"한국의 22번은 한국팀에서 유일한 브라질식 플레이를 하는 선수다."
상대 선수 하나를 제대로 못뚫어 낑낑대던 다른 21명의 한국 선수들과 대조적으로 1,2명은 가볍게 뚫고,창의적인 패스와 대포알 같은 슛팅을 마구 날리는 20살짜리 동양 선수는 당연히 주목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비록 한국팀은 1무 2패로 대회를 마감했지만,고종수는 이 대회를 통해 일본의 나카타와 함께 앞으로 아시아를 이끌어갈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죠.
하지만 바로 이 순간...즉 1998년 가을부터 고종수와 나카타의 운명은 엇갈리고 맙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축구 관계자들에게 고종수와 나카타 중 누가 낫냐고 하면 99% 고종수가 낫다고 했습니다.왜냐하면 나카타는 자신의 노력으로 "감각"을 만드는 선수인 반면,고종수는 타고난 "감각"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더군다나 이미 20살의 나이로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은 선수는 한국은 물론이고,일본에도 없던 바로 그런 시절에 나타난 선수였지 않습니까.그렇니 사람들이 고종수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근데 나카타가 이탈리아 AC페루지아 구단으로 이적하면서 상황은 급반전 됩니다.나카타는 이탈리아에서 급성장하며 단숨에 고종수를 따라잡았고,그 뒤 AS 로마,파르마와 같은 강팀으로 이적하며 세계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합니다.지금은 유럽에서도 A급 플레이메이커 평가를 받는 나카타는 이제 세계적 선수가 되었습니다.그리고 이 나카타를 통해 일본 축구는 완전 업그레이드 됩니다.2001년 당시 일본 감독이던 트루쉐 감독은 일본팀의 전술 자체를 "나카타 시프트"라고 지칭하며 나카타 일인체제로 정비할 것은 천명하죠.이것은 나카타가 일본은 물론이고,세계 축구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선수로 성장했는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고종수는 "내가 축구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였고..
'수원의 영웅'이었습니다. 수원하면 고종수였고, 고종숳면 수원이였습니다. 수원의 공격 중심은 고종수였고, 아직까지 수원팬들에게 회자되는 '고데로 트리오(고종수-데니스-산드로)'는 수원 역사상 최강의 삼각편대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수는 수원팬들.. 우리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2001년 십자인대 부상을 시작으로 끝없는 내리막에 빠집니다. 그동안 대표팀과 소속팀 경기에 많은 출장을 거듭했던 것이 돌이키수 없는 '화'가 되었던 겁니다. 19세였던 1997년 수원과 청소년 대표팀, 국가대표팀을 오가는 혹사로 체력 소모에 시달리더니 고강도 체력훈련을 이기지 못한 상태에서 경기 출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김호 감독이 히딩크 감독의 체력 훈련에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로 고종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이었고 수원이 K리그와 afc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는 등 고종수의 출장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로 증상으로 고생했던 그에게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시련이 닥쳤던 겁니다.
결국 고종수는 잦은 부상과 그로 얻은 슬럼프로 팬들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되고 말았고 일부에서는 '게으른 천재'라 했을 만큼 인내심과 의지력이 부족했던 고종수의 정신력을 비판하기도 했었죠 (선수의 노력과 고통을 무시한체..)
선수를 대하는 언론또한 문제였습니다. 1997년 청소년 대표 시절에는 고종수가 박이천 감독을 대신하여 사령탑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고, 강남에 식당 차렸거나 술집을 한다는 거짓말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루머가 여럿 나올 만큼, 재기를 노리던 고종수를 괴롭혔죠.
2007년 이였습니다. 고종수와 김호 감독이 대전에서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고 고종수 또한 재기를 노렸고 성공했습니다.
대전 창단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진출을 이끌었고 대전팬들이 경기 종료후 그라운드에 내려가 고종수와 얼싸아늘 만큼, 6강플에이오프진출의 주역은 고종수 였습니다. 다음 시즌 대전의 주장완장은 고종수의 팔에 차있었죠.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한 대전구단과의 갈등으 재계약 포기로 이어졌고, 결국 재활마저신통치 않아 은퇴를 했습니다. 고종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더 좋은 결과도 충분히... 분명 고종수는 한국축구 역사에 잊혀지지 않을 선수로남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한때 한국 축구를 화려하게 장식하다 내리막길을 걸었던 '비운의 축구천재'말이죠.
1986년 여수서초3학년때 축구시작
1993년 전국고교축구대회 MVP
1994년 백록기 MVP
1995년 12월 수원삼성입단(계약금 1원원 연봉 1300만원)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대표(18세 3개월 당시최연소)
1997, 1999년 왼 무릎연골 부상 수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출전 K-리그 MVP, 오른발가락 피로골절
2001년 8월 전남드래곤즈전 오른 무릎 십자인대파열
2003년 일본 교토퍼플상가 이적 13경기 1골 9월방출
2004년 1월 수원복귀, 10월임의탈퇴
2005년 1월 전남이적, 16경기2골
2007년 1월 대전이적 9월 전남전 837일만의 골
2008년 9월 왼무릎 재발
(선수는 일본에서 치료받길 원했고 구단은 국내 치료를 고집..)
2009년 2월 은퇴선언..
 
K-리그 171경기 37골 34도움, A매치 38경기 6골

이렇게 2009년 2월 나의 영웅은 더이상 그라운드를 휘젓는 모습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할것입니다!

No.22고종수
4 Lv. 1475/22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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