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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관심 없겠지만 나에 대해서..

해리슨 해리슨
1864 41

우선 적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될거같아서 적는 이유에 대해서 쓰겠음. 

 최근 내 신변에 급박한 변화가 생겼음. 피치못할 사정으로 가정을 깨야하는 상황이 왔고 곧 이혼 확정됨. 아이는 내가 키우기로 했고 여러가지로 복잡하고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여때까지 남에게 잘못 살았었나 하는 회의감과 도탄함에 빠져 몇달을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극복 해냈는지 모를 이 순간에도 힘든 시간이라 생각이 드는 상황들만 하나둘씩 나를 맞이하는게 참 세상 야속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를 여기서 겪었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름 사람들에게 잘해왔다고 생각함) 나는 어느정도 업보라는걸 믿고 사는 사람이라 주변에 최대한 많은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수있으면 주고 사는데 돌이켜보면 각종 막말이나 욕설등으로 남에게 상처주고 힘들게 한 시간들도 많다는걸 알았음. 물론 인과 응보라고 나에게 그런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중에 축구선수, 코치 감독, 프론트등 이 수원삼성에 관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직접적 위해를 가했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하고 살았었는데 이게 맞는 행동이였는지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후회한다. 참는것이 이기는거고 액션없이 이기는 방법에 대한 여러가지 사회적 경험들을 하다보니 어릴땐 참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어리게 살았었구나 새삼 느끼게 되는 인생을 진짜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돌아본 삶이 참 즐겁고 재밌는 일들도 많았었고, 특히 이 공간을 만들게 되기까지의 여러가지 일련의 상황, 과정들이 나만 알기는 독특하리만치 풍파를 많이 겪었던 것들이라 한번 적어보려고 글을 시작함. 

 (아 참. 이혼말인데. 내가 잘못한건 없어. 그냥 합의이혼 하기로했고 금전적으로 손해없이 아이 양육비까지 챙겨받기로 했음. 이 이야기는 더 안했으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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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안양에서 태어나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살다가 갑자기 천안으로 이사하게됨. 내가 천안살던 시절에는 집도 나름 잘 살았었어. IMF 풍파를 피해 아버지는 소하리 기아자동차  명퇴 바람이 불던 97년 초에 퇴사를 하시고 85년부터 근무하시던 회사에서 나와 중국집을 차리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있었고, 어머니는 몬테소리, 정수기, 보험등 각종 영업을 안양바닥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분이셨었는데 두분이 모은 돈으로 안양에 재건축하는 아파트 몇채를 사놓으시곤 아버지 퇴직금으로 천안에 중국집을 차렸었어. 그당시부터 갭투자에 눈이 떠있던 어머니와 금전적 감각이 전혀없었으나 정말 성실했던 아버지. 어머니는 부동산이면 돈번다, 주식하면 돈번다 라는 식으로 타고난 감각으로 돈을 벌어오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의 일을 무시하는 말투로 이야기하면 술먹고 난리를 치는 그런 패턴으로 싸움이 잦아지며 2000년도 어느날 이혼하게 되었어. 중국집도 정리하면서 나는 갑작스럽게 안산으로 이사오게 되는데 이때 엄마는 뭣때문인진 모르겠고 금전적으로 모든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에준채 동생과 나 둘만 데리고 천오백만원이라는 작은돈과 함께 나오게 되었어. 당시에는 중국애들보다 조폭문제로 몸살을 앓던 안산이였어서 동네에서 칼부림도 나던 안산 사동 영신장쪽에 자리잡고 살았지. 문제는 이 천안에서 안산으로 이사오기까지 6개월정도의 텀이 있는데 이 기간동안 학교를 못갔어. 천안살때까지만 해도 충남 영재육성반 같은데 들어가서 공부도 학교에서 1등 꾸준히 하던 시절이였는데 이 중간에 피시방이라던지 모텔 이런곳에 전전하면서 공부와는 이때부터 담을 쌓게되. 물론 돈도 없었어서 그전처럼 과외도 못받고 순전히 선행학습 덕이던 성적은 더더욱 안나왔지. 


 이때 안산으로 이사오고 처음으로 들어간 수업이 원어민강사 수업이였는데 운명적으로 그날 웃긴대학이라는걸 알게되. 원어민 강사가 낄낄거리면서 컴퓨터를 하길래 기웃거리고 봤는데 (원어민 강사가 바나나였음. 검머외) 재밌더라고. 이사오고 학교 친구들도 시골놈이라고 따돌리고 인터넷 세상에 그때부터 빠졌지. 몇몇 친한 친구들은 당시에 안양LG나 수원삼성 축구 월드컵 바람에 보러다녔고 어릴때 아버지 따라 아버지 친구따라 (이게 모 팀에 전력강화부장으로 있던...) 천안일화 경기 몇번 따라가서 봤던게 수원과의 경기였어서 그때부터 관심사 커뮤니티에 기웃거리게 되었었어. 물론 그때는 뭐 좋아한다 이런 개념보다는 관심이 있다 정도여서 글같은건 안썼어서 다른 커뮤니티에서 악명을 떨쳤지. 웃대에 피꼬츄라던지... 다 지인임... 여러므로 방황하던 시기였던 시기에 어머니도 돈 버는 족족 여기저기 투자하면서 진짜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것까지 겹친 사춘기를 겪을때 다시 아버지에게 가서 살게되는데 가보니 새엄마가 있더라. 거기에선 또 도시에서 온 놈이라고 친구들이 안놀아주곤 해서 더더 인터넷 세상에  빠졌었음. 아마 이때부터 축갤 했던거 같은데 04년도인지 05년도인지 국축갤로 갈라지면서 유동으로 즐겁게 놀았었음. 


 뭐 이렇게 방황하는 10대를 보내게 되면서 아주 아무것도 안한건 아닌데, 인터넷 친구들을 몇명 실제로 만나게 되면서 날 딱하게 봤는지 나보다 두살 어린 친구가 인강으로 SSAT(미국고졸검고) 과외선생 알바쓰면서 학점이수할때 대학교 가야한다며 자기가 하던 사업을 하나 나한테 아무댓가없이 물려줬었는데 그걸로 돈좀 깨나 벌었었고, 리니지 라는 게임을 거의 끝판까지 했었음. 마프르 서버에서 반왕혈에서 성혈 잠입해놓고 먹티하고 계정팔아서 몇천 만졌었지. 지금 보면 참 아무생각없이 살았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한 기반이라고 해야할까. 이때 첫사랑과 연애도 하고 즐거운 시간이긴 했었음. 끝이 안좋았어서 너무 힘들긴했지만. 이때가 이혼보다 더 힘들긴 한듯. 이런 방탕한 삶을 사니 엄마가 도피유학이라도 보낸다고 미국 시카고에 있던 엄마 친구에게 날 보내버리려 했었는데 서류적으로 거의 다 완성되었을때 내가 가출하면서 끝나게됨. 이때 지은 이름이 해리슨이였음. 


 뭐 여러 문제점을 안고 살았던 질풍노도의 10대를 겪었어서 이 뒤에 서술할 20대에 취직은 진짜 한번도 문제를 겪은적이 없어. 이 글에도 쓰지않은 각종 알바부터 해서 돈벌어왔던 과정들 정도만 대충 자소서에 적어두면 면접은 내 독무대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서. 난 그래서 이 과정을 후회를 안해. 단순히 방황했다라고 이야기하기엔 재밌는 일들이나 사회적 경험을 많이 쌓았어서. 지금하는일도 그런 과정들 덕분에 얻어낸것들중 하나니까. 


 여튼 이 모든 시기에도 인터넷 커뮤니티는 꾸준히 해왔었는데, 그중 하나가 국축갤이였음. 이때 스튜라는 미친놈을 만나게되고, 그 미친놈 저격수로 활동을 했지. 당시에는 사람들이 못하던 구글링 비슷한 것들을 했었음. 뭐 예를들면 예전에는 전화번호부 CD를 돈받고 팔곤 했는데 이 전화번호부가 예전에는 인명부가 있었음. 그래서 전화번호 뒷자리와 지역을 이용해서 사람 주소를 찾아낸다던지 하는 기술들이 예전에는 있었고, 스튜 집주소를 공개하면서 국축갤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지. 그게 아마 내기억에 06년도였던걸로 기억하는데, 당시부터 수원삼성 축구를 진짜로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던것 같음. 팀 선수를 다 외운다던지, 응원가를 배운다던지 그런 소소한 재미들을 그때부터 느끼게 되었었어. 그리고 동경했지. 서포터를. 어린마음에 저런 군중속에 나도 함께하고싶다 이런 마음이 있었었어. 그런데 나는 그쪽 사람들 그 누구도 알질 못했고, 삶이 인터넷에서만 맴돌던 삶이다보니 애초에 사람 자체를 크게 신뢰를 안했었고 오프라인 모임에 나갈 생각도 잘 안했었어. 그리고 스튜를 집주소 공개로 공격했던것, 그런 개인 신상 유포에대한 두려움같은게 컸어서 동경만 하고 말곤 했는데, 이때 하나 이슈가 생겨. 안산 할렐루야 연고이전. 



여기까지가 1편이다. 2편은 나중에 쓴다. 

해리슨 해리슨
16 Lv. 23588/26010P

원하는건 수원의 정상화

그것밖에 없음. 

잘해봐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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